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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에 있는가
김상현
내가 처음 흐릿해진 것은 아마도 아홉 살 때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삼촌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이미 같이 살다시피 하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이 나를 동물원에 데리고 갔다. 오랑우탄과 기린과 하마를 보았지만 나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하품을 하자 삼촌과 그의 여자친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마 내가 하마를 흉내 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이 좋아서 계속 입을 쩍쩍 벌렸지만, 그들은 곧 관심 없어 했다. 나는 다시 침울한 아이가 되었고 삼촌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삼촌이 잠시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사이, 확실하진 않지만, 그때 내가 삼촌의 여자친구에게 뭔가 무례한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녀가 나를 두고 어디론가 가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 동물원 벤치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버림을 받은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에 휩쓸렸다. 그런 상황에서 쓸 만한 물건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졌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고작 아홉 살 아이의 주머니에는 먼지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홀로 죽고 말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겁에 질린 나는 삼촌과 그의 여자친구를 찾으려 이곳저곳을 헤맸다.
한참을 걷다 보니 용도를 알 수 없는 회색 단층 건물에 도착했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한둘씩 동물원을 떠나고 있었다. 지쳐버린 나는 계단에 앉아 한참 울다가 그것 또한 지쳐서 그만두었다. 나는 쪼그려 앉은 채로 불안해하며 울퉁불퉁한 시멘트 벽을 긁기 시작했다. 손톱이 갈리고 손끝에 상처가 났다. 나는 통증으로 또다시 버림받는 몹쓸 아이가 되어버린 것을 스스로 벌하고자 하였다. 이대로 해가 지기 전까지 나를 모조리 갉아버리자. 한편으론 그것에 몰두해 최선을 다한다면 삼촌이, 아니 어쩌면 그의 여자친구가, 나를 찾으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해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벽 위에 닿는 빛의 면적은 계속해서 넓어지다 이내 어두컴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분명 이상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작은 아이가 자신의 손톱으로 사정없이 벽을 긁어대는 모습은. 누구든 한 번쯤 아이를 걱정된 눈으로 쳐다보고, 말을 걸고, 그 아이의 손을 붙잡아 줄 법한데,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지나치게 행복해 보였다. 나는 벽에 걸린 작은 거울을 발견했다. 충분히 다가가면 내가 나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거울이었다. 내가 나로 보일 정도로 충분히 멀어지자 내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거울 속의 나는 뿌옇고 희미하고 흐릿했다. 나는 흐릿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거울 속의 흐릿한 내가 크게 웃었고, 나는 점점 더 흐릿해졌다.
나는 그 사실을 삼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다시 삼촌이 나를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어딘가가 아파 병원에 간 일이 있었는데, 삼촌이 내 옆에 앉아 있었고, 청진기를 든 의사가 어디 한번 볼까,라고 말하면서 내게 윗옷을 들어 올리라고 하였다. 나는 옷을 벗었다간 의사는 물론이고 삼촌마저 내가 흐릿해졌다는 것을 알게 될까 봐 겁에 질렸다. 내가 윗옷을 꽉 붙잡고 놓지 않자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삼촌에게 괜찮다면 잠깐 나가 있어달라고 얘기했다.
삼촌이 나가자 의사는 다시 내게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옷을 한번 들어보라고. 나는 움켜쥐었던 손에 힘을 풀기 시작했고 의사는 천천히 내 옷을 들어 올렸다. 의사는 내가 앉아 있던 회전의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내 몸을 보았다. 삼촌에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겁에 질린 내가 말했고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거니,라고 물었다. 내게 필요한 도움은 의사가 전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작은 목소리로 내가 사라지지 않게 해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고,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주세요. 내가 묻자 그는 자기가 경찰을 불러 삼촌과 얘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멍청하게도 헛된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도울 수 없음에도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는 청진기를 내 가슴에 대고 혹시 자주 배가 아프거나 그러니?라고 물었다. 나는 그의 청진기를 냅다 움켜쥐고 땅바닥에 던져버리며 말했다. 거기는 가슴이에요. 내 가슴에서 손 떼라고요!
의사는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문이 벌컥 열리고 삼촌이 들어왔고 간호사 몇 명도 진료실로 따라 들어왔다. 삼촌이 내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진료실을 박차고 나왔다. 나는 침묵했고 삼촌은 좆같은 변태 새끼가 있는 병원이라고 병원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수척하고 말이 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나는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나의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굳게 생각했다. 다행히 선생과 학생들 모두 나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내가 이미 충분히 흐릿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가 문제를 회피하기 적당한 곳은 아니다. 학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그렇기에 늘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벚꽃이 활짝 핀 봄이었다. 수학 선생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칠판 가득 수학 문제를 적어놓고 아이들이 그 문제의 풀이에 매달리는 동안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그날도 그는 수학 문제를 칠판에 적어놓았다. 딱딱 또각또각. 문제 앞에 선 아이들의 분필 소리만이 교실에 울려 퍼졌다. 수학 선생은 별안간 책을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1번부터 나와. 그는 40여 명 아이들을 차례차례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공장 프레스 기계에 들어가는 원료처럼 차례로 줄을 서서 수학 선생이 자신을 두들겨 패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다가왔고, 나는 수학 선생이 내가 너무 흐릿해진 나머지 제대로 때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30여 명을 처리한 수학 선생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나의 엉덩이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나는 눈을 감고 그가 제대로 명중시키길 바랐지만, 나의 기대와 달리 몽둥이는 허벅지와 종아리 부근을 스치며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몽둥이는 캉캉캉 소리를 내며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갔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웃어? 수학 선생은 교실을 둘러보다가 한 명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너 웃었지, 이 새끼 너 앞으로 나와. 앞으로 호출된 아이는 27번이었다. 수학 선생은 오른손을 주무르며 27번과 내가 서로를 마주 보고 번갈아 뺨을 때리게 했다. 27번이라고 나를 똑바로 때릴 수 있었겠는가. 그 아이의 손은 힘없이 허공을 가르면서 내 뺨 앞에서 멈추거나 간신히 턱을 스치기만 했다. 27번은 조용히, 괜찮니?라고 내게 물었다. 괜찮은지 묻고 싶은 것은 나였는데 말이다. 수학 선생은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왼손으로 27번의 턱을 잡고는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얼굴, 아니 몸 전체가 수학 선생의 손놀림을 따라 춤을 추듯 덜컹거렸다. 몸을 따라 내 눈도 희미해진 것인지 그 아이의 얼굴이 점점 뿌옇게 변해갔다. 팔뚝으로 눈을 비비면 잠시 또렷해졌다가 또다시 흐려지고.
수학 시간이 끝나고 나는 27번을 찾아갔다. 나 때문에 미안해. 27번은 휴지를 말아 얻어터진 코를 막으면서 말했다. 27번의 얼굴이 다시 뿌옇게 변해갔다. 너는 눈이 삐었냐. 이게 왜 너 때문이야.
어느 날 삼촌이 밥을 먹다가 내게 말했다. 너 안경을 써야 하는 거 아니냐? 뭐가 제대로 안 보이면 안경을 써야지.
나는 삼촌이 내 방에 들어와 일기를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제 그는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가 죽도록 미웠고, 그가 내 삶에 간섭하지 않고 어서 빨리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경을 써도 세상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좌우로 요동치고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래도 안경 덕분에 나는 이따금 뚜렷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뚜렷해질 때면 내가 그보다 더 흐릿해질 수는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되었다. 내 주변에는 온통 나와 닮은 모습의 사람들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옷을 입고, 하나의 생각을 이루고,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길 강요받았다. 누군가 내 앞에서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그때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내가 더없이 또렷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그들은 사진을 진지하게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지금의 나와 사진의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들은 마침내 사진 속 한 사람을 지목한다. 그러나 매번 다른 사람을 지목한다. 나는 종종 그것이 나라고 말하기도 하고,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 역시 가끔 사진을 본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그 누군가가 나여도 상관없고, 내가 그 누군가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당신은 나를 본 적이 있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