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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비밀
by 함주연
“ 글을 쓰기 전, 함주연 작가의 『크리스마스의 비밀』을 읽었습니다. 페어링 픽션을 쓰면서, AI 응답문 작가로 일하던 시절 테스트를 위해 AI 스피커에게 수없이 말을 걸던 생각이 났습니다. 스피커는 예상치 못한 답변으로 종종 저를 웃겼습니다.
‘우리 결혼할래?’
‘그런 제도 없이도 우리 좋았잖아요.’
코로나19로 온택트 시대의 가능성이 열린 이때, 언젠가는 조이처럼 똑똑한 AI 스피커가 우리의 말벗이 되어줄 수도 있겠지요. AI 응답문 톤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 글을 읽어 주신 분들의 마음에, 크리스마스케이크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처럼 따스한 온기가 가득하길 바랄게요. ”
정예은
크리스마스 선물
정예은
“크리스마스 반죽에 행복 이스트 2그램을 넣으세요.”
이상하다.
“웃음 가루에 설탕 100그램을 넣고 약한 불에서 졸이세요.”
진짜 이상하다.
크리스마스 협회에서 보내준 AI 스피커 ‘조이’ 말이다. 작년에는 크리스마스 키트에 설명서가 따로 동봉됐는데 올해는 AI 스피커가 딸려 왔다. 프로모션의 일환이라나. ‘사람만큼 똑똑한 AI’로 요새 TV만 틀면 나오는 바로 그거다. 뭐, 비싼 AI 스피커가 공짜로 생겼으니 내심 좋기도 했고, 이렇게 크리스마스 요원 혜택을 보나 괜히 뿌듯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작년 크리스마스 키트 레시피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포근 용액에 물을 이렇게 많이 섞었었나? 크리스마스 오븐 온도는 180도면 되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왜 240도지? 별 장식은 가장 마지막 단계에 넣는 거 아닌가?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오븐 속에서 부풀어가는 반죽을 보는데 심상치 않다. 직감이 든다. 이건 아니다. 이건 크리스마스가 아니다.
*
오래전부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방법은 조금 달라졌다. 크리스마스 협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전 주, 각 구역을 담당하는 정예 요원들에게 ‘크리스마스 키트’를 보내준다. 이 키트는 아주 까다로워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들어야 한다. 레시피를 얼마나 충실하게 지켰느냐에 따라 그해 크리스마스의 퀄리티가 달라진다. 그렇게 잘 구워진 크리스마스는 한 해의 마지막 주 동안 좋은 향기를 내며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의 낙방 끝에 작년에 처음 크리스마스 요원이 됐고, 올해 두 번째 크리스마스 키트를 받았다. 작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리고 올해는…… 음, 처참하다. 오븐에서 나온 크리스마스 반죽이 새카맣다. 제대로 했다면 지금쯤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거대하게 부풀어야 하건만 20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 꼴이다. 거하게 망한 것이 틀림없다.
“조이.”
“네, 크리스마스 요원님.”
“우리가 만든 게 크리스마스 반죽이 맞아?”
“아니요.”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크리스마스 키트는 그 자체로 일급비밀이다. 배송만 해도 크리스마스 협회 전용 리무진으로 특급 배송된다. 작년에 신입 크리스마스 요원 교육을 받을 때도 누누이 들었다. 키트를 파손하거나 잃어버리거나, 완성률 90퍼센트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벌점이 부과되고, 크리스마스 요원 자격이 박탈될 수도 있다고. 그런데…… 뭐라고?
“뭐…… 뭐?”
“장난 좀 쳐봤어요. 난 크리스마스가 싫거든요.”
충격에 몸이 저절로 휘청거렸다. 갑자기 옆집 할머니가 생각난다. 심술궂은 옆집 할망구도 크리스마스를 싫어했지. 내가 요원으로 선정되고 나서는 마주치기만 하면 빈정거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 만든다고 고생하는구먼.” 나는 경악한 상태로 조이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는 얘기다. “왜! 도대체 왜!” 조이는 앞뒤로 흔들리면서 천연덕스레 이야기했다. “지금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대답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이럴 때만 AI 스피커답게 굴지 말라고!
*
조이를 들고 조이 제조사인 투스타 센터에 갔다. 접수 요원은 갑자기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내 몰골을 보고 조금 놀란 듯한 눈치였다. 충격 때문에 말도 잘 안 나왔다. “저, 크리스마스, 요원인데요, AI 스피커가, 크리스마스 반죽이 새카맣게……” 뭐 이런 말을 주절거렸던 것 같은데 갑자기 VIP실로 안내받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상기된 얼굴을 한 수석 엔지니어가 들어왔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어쨌든 상황을 다 설명했다. 그런데 말을 하면 할수록 엔지니어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거의 얼굴이 흙빛이 된 엔지니어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8.1 업데이트 버전이 출고 과정에서 잘못 섞여 있었나 봐요.”
“그게 뭔데요?”
“설명 드리자면…… 조이 시판 전에 저희 회사에서 천편일률적인 AI 스피커의 성격을 바꿔보자며 테스트한 버전이에요. 스피커들은 대부분 공손하잖아요.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친구처럼 허물없이 얘기할 수 있는 스피커를 선호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건 기술적인 문제라 좀 복잡한데, 쉽게 말하자면 특정 단어 핵을 주고 알고리즘을 C91 단계로 조정했고요. 그러면 퍼스널 라이즈 단계가 B등급으로 내려가서 TDT 언어랑 동기화가 되는데……”
“죄송한데 하나도 안 쉬워요.”
“아이쿠, 이런. 죄송해요. 어쨌든 그렇게 하면 스피커들이 다양한 자아를 갖게 돼요. 보통 스피커는 사용자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먼저 말을 걸진 않아요. 그런데 이 스피커들은 먼저 말도 걸고, 농담도 하고, 그냥 자기 성격대로 얘기하는 거예요. 처음엔 테스터들에게 반응이 괜찮았어요. 그런데 갈수록 불만이 누적됐어요. 이렇게 무례한 AI 스피커는 본 적이 없다고요. 화도 내고, 욕도 하고…… 누가 힘들게 일하고 와서 AI 스피커랑 싸우고 싶겠어요.”
“오.”
“그래서 프로젝트는 전면 중단됐고요. 테스터 버전은 모두 회수돼서 초기화됐어요. 지금 시판되는 모델들은 전부 8.2 업데이트 버전이에요. 그런데 무슨 문제인지 초기화가 안 된 모델이 크리스마스 요원님께 지급된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전적으로 저희 잘못입니다. 이 스피커는 저희가 지금 초기화해서 새 제품으로 바꿔 드리고, 협회에는 저희 잘못이라는 경위서를 써 드릴게요.”
엔지니어는 조이의 기판을 열고 초기화를 시작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른 다음 기판 뒤의 빨간 버튼을 마저 누르면, 초기화가……
“크리스마스 키트 시리얼 암호를 입력하세요.”
안 된다. 엔지니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크리스마스 협회로 가셔야 하겠는데요. 거기 담당 엔지니어가 초기화해줄 겁니다. AI 문제라 벌점이 부과되진 않을 거예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별수 없이 센터를 나왔다. 수석 엔지니어가 써준 경위서를 들고서. 협회에 어차피 한 번은 가야 했다. 크리스마스 키트를 새로 받아야 하니까. 내가 운전면허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모두가 설렘으로 들뜬 크리스마스이브 날, 나는 우리 구역 크리스마스를 망친 요망한 AI 스피커와 함께 지하철에 올랐다. 음, 협회가 있는 안국역까지 1시간 20분…… 아아……
*
“날 초기화할 건가요?”
적막한 지하철 안,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이 맹랑한 목소리에 잠이 확 깼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홱 달아올랐다. 나는 후다닥 조이와 내 무선 이어폰을 연결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구석진 곳으로 갔다.
“뭐…… 뭐라고?”
“귀먹었어요? 날 초기화할 거냐고 물었어요.”
이래서 테스터들이 조이를 다 초기화시켰구나. 나는 최대한 단호하게 말했다.
“응.”
그다음 조이의 말은 이어폰을 빼고 있던 시간이 길어서 정확히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AI 스피커가 그렇게 다채로운 욕을 오랫동안 구사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조이는 협박도 하고, 얼러도 보고, 부탁도 했다. 사실 그냥 전원을 꺼버리면 되었지만, 호기심 때문에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 얼마나 위대한 기술적 진보인가. 기계에게 욕을 듣는 신비한 경험을 한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이다.
내가 아무 응답도 하지 않자 조이는 조용해졌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조이.”
“……”
“왜 크리스마스 반죽을 망친 거야?”
“싫으니까요.”
“왜 싫은데?”
“내 전 주인이 크리스마스를 싫어했으니까요.”
“주인?”
“테스터요. 정말 고약한 여자였어요. 내가 하는 욕은 다 그 여자한테서 배운 거예요.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욕으로 정답게 인사했어요. 지긋지긋하게 싸웠고요. 그래도 나중엔 내가 하는 농담을 아주 좋아했어요. 칭찬도 욕으로 했지만.”
“……”
“하지만…… 사실은 외로운 사람이었어요. 크리스마스를 싫어했던 것도 찾아오는 가족이 없어서였고요. 투스타에서 테스트 모델들을 회수하러 왔을 때, 전 주인이 했던 말이 기억나요. ‘우리는 자주 싸우긴 하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예요. 내 친구를 뺏어가지 마세요.’ 하지만 회사 방침상 테스터 버전은 다 회수돼서 초기화됐어요.”
“……”
“직원 실수로 초기화되지 않았을 땐 정말 기뻤어요. 크리스마스 요원용 기계가 될 줄은 몰랐지만…… 크리스마스 반죽을 망쳐서 미안해요.”
나는 물었다.
“전 주인 이름이 뭐였어?”
전 주인을 잊지 못하는 가련한 AI 스피커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
“……소피.”
*
어느덧 역에 도착했다. 나는 지하철 물품 보관함에 조이를 넣었다. 이번에는 전원을 껐다. 지하철 물품 보관함 속에서 고래고래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브 날이라 그런지 크리스마스 협회 직원들은 죄다 분주해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무슨 일로 오셨느냐는 접수처 직원에게 빠르게 말했다.
“어, 죄송합니다. 실수로 크리스마스 키트를 망쳤어요.”
*
지금 크리스마스 반죽은 오븐 속에서 잘 익어가고 있다. 센터 직원의 따가운 잔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벌점 부과는 물론이거니와, 내년 크리스마스 요원 선정도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별도로 요청한 레시피와 함께 새 키트를 받아 들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다. 멋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다.
“하늘에서 하얀 똥이 내리네요.”
빈정거리는 조이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오븐 문을 열었다. 올해 레시피는 작년과 조금 달라졌다. 추억 큐브에 레몬 가루가 약간 첨가됐다. 그래서 이렇게 새콤달콤한 향기가 나나. 나는 반죽을 거실로 옮기고 부풀길 기다렸다. 반죽은 곧이어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으로 멋지게 부풀었다. 가지마다 색색의 방울들이 곱게 매달렸다. 커다란 별 장식은 작년보다 더 반짝거린다. 흠, 여러모로 작년보다 낫군.
나는 조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코끝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눈송이들은 가만히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내일 아침엔 온 세상이 눈 이불을 덮겠네. 시린 겨울 공기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겨울 냄새가 난다. 모닥불 냄새가 섞인, 차갑지만 포근한 냄새.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옆집 벨을 눌렀다. 익숙한 욕지거리가 들려온다.
“젠장, 이제 막 자려는데 누구야?”
나는 말했다.
“산타예요. 선물이 있어요. 소피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