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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구하기 대작전

 

by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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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보면 우울했으나 생각보다 괜찮았던 순간이 있고, 괜찮은 줄 알았는데 좋지 않았던 순간이 있기도 하다. 이상민 작가의 『식량 구하기 대작전』은 어느 날 느닷없이 집이 허물어지면서 초초네 가족이 그동안 모아둔 식량과 거처를 잃어버리면서 시작한다. 초초는 살면서 때때로 힘이 들 때 혼자 식량을 구하러 간, 용감했던 자신을 떠올리게 될까? 그날의 기억은 늘 좋게만 남아있을까? 두 가지 질문을 떠올리며 페어링 픽션을 쓰게 되었다. 

​정신해

 

당신이 좋아할지도 모르는 식량

 

정신해 

   퇴근길에 초당옥수수 하나를 받았다. 차장이 대리에게만 준 것을 대리가 나에게 나눠 줬다. 옥수수 알갱이는 단단했고 흰색 막이 얇게 씌워져 있었다. 삶지 않고 이대로 먹으면 된다는 대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초당옥수수를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옥수수의 맛보다는 차장이 내게 옥수수를 주지 않은 이유가 더 궁금했다. 생각해보면 차장이 나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꽤 있었다. 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도 잦았고 수습하려고 나서다가 더 큰 실수를 만들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러 잠실역으로 가고 있다.

   그 사람과 내가 사적으로 만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잠실에서 만났다. 지금과 달리 겨울이었고 나는 백수였다. 그날 롯데백화점 지하에 있는 분수대 앞에서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를 받았다. 나 위에 있어, 지금 내려갈게. 지하철을 타고 온다는 그녀를 배려해서 장소를 잡았기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몇 분이 흐른 뒤 다리가 불편한 듯 절뚝거리며 빈 광장을 가로지르는 한 여자가 보였다. 검은색 패딩에 녹색 키플링 가방을 크로스로 멘, 나의 고모였다.

   고모와 나는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늘 집에서, 그것도 명절 때나 보는 고모를 밖에서 만나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고모는 많이 기다렸냐고 머쓱하게 웃었다. 서로 안부를 잠깐 주고받았다. 할 말이 없어 엄마 아빠 이야기도 했다. 당시 부모님은 동남아 여행을 가 있었다. 덕분에 내가 고모와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우리의 만남을 알게 된다면 꼬치꼬치 물어봤을 테니까. 사촌 언니 오빠들이 알면 더 놀랄지도 모르겠다. 네가 고모를 만났다고? 도대체 왜?

   어린 시절 내 볼을 꼬집으면서 정신 똑바로 차려라, 하고 성질을 내던 고모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창문을 열고 인사를 하던 내게 그녀는 삿대질하며, 공부 열심히 하란 말이야, 그게 효도야 하고 소리를 쳤다. 나뿐만 아니라 사촌 언니 오빠,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도 그랬다. 쑥스러워서 인사를 못 하는 아이에게 인사 똑바로 해! 하고 혼냈고 아이가 울면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낯가림이 심한 나도 고모 앞에서는 잘 훈련된 병사처럼 인사를 제대로 했다.

   어른들은 종종 흥분해서 얼굴이 벌게진 고모를 말렸다. 제사가 끝난 뒤 어른들이 맥주 한 잔을 마실 때 고모는 혼자 소주를 마시다가 금방 취해버렸으니까. 두서없이 자기 이야기만 반복했고 다른 고모들과 말다툼을 벌였다. 그렇지만 고모는 혼자 사는 할머니를 챙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걸어서 20분 거리에 살았다. 고모도 혼자였다.

   “지금 어디니. 난 가고 있어.”

   버스에서 고모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10분 있으면 도착한다고 답했다.

   “응, 그래. 천천히 와.”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고모의 말투는 언젠가부터 누그러졌다. 특히 어미를 –니로 끝나게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게 들렸다. 정작 말의 내용은 다정과 멀었다. 그날 광장에서도 내게 공무원 또는 돈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라고 했다. 나는 웃어넘겼다. 더 이상 고모가 무섭지 않았다. 나는 서른 살이 넘었고 원한다면 친척 모임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 너는 잘하겠지.”

   고모는 의외로 덤덤하게 반응했다. 그러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노란색 쇼핑백을 내밀었다. 앞뒤로 부풀어 오른 백 안에는 위아래로 세트인 두꺼운 겨울용 잠옷이 들어 있었다. 고모는 내가 어릴 때부터 명절마다 양말, 속옷, 그리고 잠옷을 사 와서 친척들에게 나눠 줬다. 양말이나 속옷은 가져가서 쓰기라도 했지만 잠옷은 인기가 없었다. 다들 짐스러워서 놓고 가거나 아무도 안 입으니 사 오지 말라고 고모를 타박했다. 그렇지만 집에서 뒹구는 걸 좋아했던 나는 고모의 잠옷을 꽤 좋아했다. 면이라 부들거리는 감촉도, 고무줄이라 편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는 바지가 낡아서 동생, 아빠, 엄마 것까지 내가 입었다. 어느 날 아빠는 내가 고모 잠옷을 즐겨 입는다고 고모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고모가 환하게 웃는 건 그날 처음 본 것 같았다.

   그 이후로 고모는 내 잠옷만 사 왔다. 식사 시간 중에 나를 조용히 사촌 언니 방으로 불러 잠옷이 든 쇼핑백을 건네줬다. 나는 그 비밀스러운 회동이 얼떨떨했다. 잠옷을 가지고 싶은 건 맞지만 고모와 가까이 서서, 그것도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건 긴장이 됐다. 그래서 고모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야 잠옷을 얼마나 싸게 샀는지, 어떻게 사게 됐는지, 사이즈는 어떻게 맞췄는지에 관한 이야기란 걸 알았지만. 고모와 만나는 건 1년에 딱 두 번, 네 시간 정도였고 그 순간만 넘기면 됐다. 그래서 묵묵히 받기만 했는데 작년 겨울 잠옷을 줄 테니 만나자고 고모에게서 연락을 받은 거였다.

   쇼핑백을 받은 뒤에도 고모와 나는 광장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다. 붙임성이 없는 건 나나 고모나 비슷한 모양이었다. 지하라서 햇빛이 들지는 않아도 바람을 막아줘서 앉아 있을 만했다. 고모는 아침 먹었니? 하고 묻더니 가방 앞주머니에서 낱개로 된 딸기맛 몽쉘, 바나나, 초콜릿과 크래커를 꺼냈다. 우리는 간식을 먹으면서 분수대, 광장 그리고 롯데월드로 향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나는 고모에게 다리가 왜 아픈지 물었고 고모는 공원에서 운동하다가 발목을 삐었다고 대답했다. 과자를 다 먹은 고모가 종이컵 두 개를 꺼냈다. 이제 막 문을 연 백화점으로 들어가 푸드코트에 있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았다. 거기에 자기가 가져온 커피 믹스를 탔다. 나 한 잔, 고모 한 잔. 우리는 개업 준비 중인 식품 코너 맞은편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평소에도 바리바리 싸서 다니세요?”

   “응. 넌 아니지?”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머뭇거렸다.

   “괜찮아. 네 아버지가 벌잖니.”

   우리는 그날 화장실 앞에서 헤어졌다. 8호선을 타기 위해서 같이 월드타워를 가로질러 걷다가 고모가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화장실 벽 앞에서 고모는 잘 가라고 내게 손을 흔들었다. 문득 내가 재수를 하던 시절 고모와 대화를 나눴던 순간이 떠올랐다. 불을 켜지 않아서 조도가 낮고 침침한 방 안에서 고모는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말했다.

   “그거 내 동생 돈이야.”

   그건 잠옷 이야기였을까, 내가 다닌 재수 학원의 등록금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둘 다였나.

   멀리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고모의 모습이 보였다. 여름이라서 우리 둘 다 가벼운 차림새였다. 고모는 발목이 나았는지 똑바로, 그러나 여전히 엉덩이를 약간 뒤로 빼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두툼한 쇼핑백을 건넸다. 광장에서처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이곳은 협소했고 사람도 너무 많았다. 인파 속에 있는 고모와 있는 게 새삼 어색했다. 고모는 왜 자꾸 잠옷을 줄까. 푹신한 잠옷을 포장하면서 고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만 가보겠다고 인사를 했다. 고모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이 뜸을 들였다.

   “너 왜 문자 안 했니?”

   “문자요?”

   “사이즈 맞는지 궁금해서 잠도 못 잤다.”

   뜻밖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고모는 정말 서운해 보였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초당옥수수 좋아하세요?”

   고모는 옥수수를 받아 갔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던 사람처럼 키플링 가방에서 검은색 비닐봉투를 꺼내서 담았다. 첫 만남 때와 달리 고모가 먼저 지하철 타는 쪽으로 멀어졌고 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고모는 싫은데 고모가 준 잠옷은 좋을 수 있는지, 잠옷을 주는 고모만 좋아해도 되는지. 쇼핑백을 폭 안아도 답은 알 수 없었다. 나는 초당옥수수의 맛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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