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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도 괜찮은 체육대회
by 박성윤
“ 글을 쓰기 전, 박성윤의 『혼자여도 괜찮은 체육대회』를 읽었습니다. 시끌벅적한 날 혼자일지도 몰라 걱정했던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이 동화를 쓰게 됐습니다. 혼자여서 괜찮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세상은 내 맘을 아는 친구 한 명만 있어도 꽤 괜찮은 곳이 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첫눈이 내려 창 밖 풍경이 온통 하얗습니다. 이제 밖으로 나가 누군가의 발자국 옆을 나란히 걸어보려고요. ”
김다노
괜찮은 생일 파티
김다노
로희는 아까부터 창밖만 보고 있어요. 하얗게 눈이 쌓일수록 로희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오늘은 12월 25일. 모두가 기다리던 크리스마스예요. 하지만 로희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오늘은 바로 로희 생일이기도 하거든요.
로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일에 친구들을 초대했어요.
이틀 전, 겨울방학식 날이었어요.
“12월 25일이 내 생일이니까 우리 집에 와주면 좋겠어.”
로희가 정성스럽게 만든 초대장을 반 친구들에게 돌렸어요.
“그때는 너무 춥지 않아?”
“난 내일 따뜻한 나라로 떠나는데.”
“그날은 온 가족이 모여야 한대.”
친구들이 파티에 올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말했어요.
로희는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로희의 생일은 겨울이고, 방학인 데다가, 크리스마스이기까지 하니까요. 그래도 아이들 중에서 인기 많은 친구가 세 명이나 오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럼 됐지, 뭐.’
생일날 아침, 로희는 눈을 뜨자마자 파티 준비를 했어요. 아빠는 벽에 커다란 풍선을 달고 엄마는 꽃병에 꽃을 꽂았어요. 로희는 아끼고 아끼던 미키마우스 접시 세트를 꺼냈어요. 강아지 뭉치도 깨끗이 목욕시켰어요.
식탁에는 로희가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하고 가운데에는 로희가 고른 딸기케이크가 놓여 있었어요. 케이크가 얼마나 큰지 거인들이 먹어도 남을 지경이었어요.
‘이제 친구들이 오겠지.’
곧 로희가 말한 파티 시간이 돼요.
딩. 동.
드디어 첫 번째 친구가 도착했어요. 로희는 얼른 뛰어나가 문을 열었어요.
“안녕.”
서아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서 있었어요. 서아는 로희네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해서 인기가 많은 친구예요. 서아가 쓴 안경에 순식간에 김이 서렸어요.
“와줘서 고마워!”
로희는 서아가 들어올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어요. 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미안하지만 갑자기 학원 보충이 잡혀서 가봐야 해. 이걸 빠지면 다음 진도를 따라잡을 수 없거든. 선물이라도 주려고 들렸어.”
서아가 로희에게 커다란 종이봉투를 내밀었어요. 로희가 얼떨떨한 채로 봉투를 받아 들자 서아는 학원에 늦겠다며 서둘러 떠났어요.
“어머, 쟤는 이런 날에도 학원에 가네. 참 안됐다.”
엄마가 로희 눈치를 보며 말했어요.
봉투 안에는 두꺼운 문제집이 세 권이나 들어 있었어요. 로희는 봉투를 거실 구석에 갖다 놨어요.
꽃병 속 꽃이 기운 없이 축 처져 있었어요.
“다 시들었네.”
로희가 분무기로 물을 뿌려보았지만 소용없었어요.
딩동 딩동 딩동!
초인종이 연달아 세 번이나 울렸어요. 성격 급한 친구인 게 틀림없어요. 로희는 잽싸게 문을 열었어요.
“안녕!”
노란색 털모자를 쓴 도윤이가 서 있었어요. 도윤이는 로희네 반에서 제일 재밌어서 인기가 많은 친구예요.
“춥지? 얼른 따뜻한 거라도……”
로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도윤이가 손바닥을 들어 올렸어요. 도윤이는 엄청나게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었어요.
“잠깐! 내가 먼저 말할게! 아빠가 그러는데 스키는 오늘같이 눈이 펑펑 내릴 때 타야 한대. 그래서 지금 급하게 스키장에 가는 길이야. 오늘 아니면 언제 탈 수 있을지 모르거든. 나 말고도 다른 애들도 오는 거 맞지? 같이 갖고 놀아!”
도윤이가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승용차가 서 있는 곳으로 미끄러지듯 달려갔어요. 승용차 지붕 위에는 기다란 스키가 놓여 있었어요.
“흠흠, 스키 타기 좋은 날씨긴 하네……”
아빠가 로희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어요.
로희는 도윤이가 준 상자를 열어봤어요. 안에는 새로 나온 보드게임이 있었어요. 로희는 상자를 옷장 안에 넣어버렸어요.
벽에 붙여놓은 ‘1225’ 숫자 풍선이 흐느적거렸어요.
“바람이 빠졌네.”
로희는 풍선 구멍에 공기를 후후 불어보았지만 그대로였어요.
디잉—도옹.
“안녕……”
문을 열자 연우가 어깨를 한껏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어요. 연우는 로희네 반에서 제일 착해서 인기가 많은 친구예요. 연우는 커다랗고 두꺼운 책을 안고 있었어요.
“춥지? 얼른 들어와!”
로희는 연우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소리쳤어요. 하지만 연우는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어요. 연우가 입술을 옴짝달싹하다가 겨우 소리 내어 말했어요.
“사실 지금 교회 가는 길이야.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그땐 입이 안 떨어져서…… 진짜 미안.”
다시 보니 연우가 품에 안고 있는 건 성경 책이었어요.
“대신 네 생일이니까 내가 기도해줄게. 자, 내 손을 잡고……”
“잘 가. 안녕.”
로희가 문을 닫았어요.
“끼잉, 끼잉.”
뭉치가 로희를 올려다봤어요.
‘네가 이해해. 오늘은 예수님 생일이기도 하잖아.’
뭉치가 로희 다리에 코를 비볐어요.
음식은 차갑게 굳어 있었어요.
“다 식었네.”
로희가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렸지만 더는 예전만큼 맛있어 보이지 않았어요.
“로희야, 그냥 우리끼리 생일 파티 할까?”
아빠가 물었어요.
“맞아. 그동안에도 우리 넷이서 재밌었는데, 뭐.”
엄마가 맞장구쳤어요.
“……”
뭉치는 가만히 로희 품에 안겨 있었어요.
로희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았어요. 저 멀리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커다란 나무가 혼자 우뚝 서 있었어요.
세 친구가 걸어온 길에 새 눈이 쌓여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어요. 밖은 어둡고, 눈은 그칠 것 같지 않았어요.
‘이제 올 친구는 없겠지.’
로희가 벽에 걸어놓은 달력을 올려다봤어요. 오늘 날짜에 커다랗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어요. 올해 1월, 로희가 달력을 받자마자 그려놓은 거예요. 로희에게는 1년에 딱 하루뿐인 자신의 생일이 모두에게 중요한 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로희는 식탁으로 갔어요. 로희와 가족들만 먹기에는 음식이 너무 많았어요. 특히 케이크가요. 정말이지 커도 너무 컸어요.
‘이제 생일에 친구 초대는 안 할 거야.’
로희가 생각했어요.
……띵동.
희미하게 초인종 소리가 들렸어요.
로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어쩌면 로희가 잘못 들은 건지도 몰라요. 밖에서 세차게 부는 눈보라 소리나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착각했는지도요.
……띵동.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렸어요.
그제야 로희는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갔어요.
띠잉—동.
로희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에요. 초인종이 울린 게 분명했어요.
“……누구세요?”
로희가 바깥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로희야, 나야! 하윤이.”
벌컥.
정말 문 앞에 하윤이가 서 있었어요.
하윤이는 그다지 공부를 잘하지도, 재밌지도, 착하지도 않은 친구예요. 하윤이의 하얗고 통통한 볼이 찬바람을 맞아 발갛게 되어 있었어요.
“내가 좀 늦었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하윤이가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말했어요.
로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삐죽 내밀었어요.
“왜 그래? 내가 너무 늦어서 화났어?”
하윤이가 물었어요.
“아니.”
로희가 대답했어요.
“겨울방학이잖아. 눈도 많이 오고, 크리스마스이고. 네가 못 올 줄 알았거든. 학원 보충이 생겼다거나, 스키장에 가고 싶어졌다거나, 혹은 교회에 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로희가 겨우겨우 목소리를 내어 말했어요.
“그럴 뻔하긴 했는데 그래도 네 생일 파티에는 꼭 와야 할 것 같았어.”
“왜?”
“나도 생일이 여름방학이거든. 친구들을 초대하면 덥다, 여행 간다, 워터 파크 개장 날이다, 하면서 다들 못 온다고 하는 거야. 어쩐지 너도 그럴 것 같아서.”
하윤이가 말을 마치자마자 얼른 말을 이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네 생일이잖아!”
로희는 여름방학식 때 하윤이가 생일 파티 초대장을 줬었는지 생각해봤어요. 혹시나 자기가 그 초대장을 매몰차게 돌려줬는지도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시간은 기억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년 여름에는 꼭 하윤이 생일 파티에 가겠다고 다짐했어요. 더위도, 여행도, 워터 파크도 로희를 막지 못할 거예요.
“나 들어가도 돼?”
하윤이가 코를 훌쩍거리며 물었어요.
“그럼, 얼른 들어와!”
로희가 활짝 문을 열었어요.
“어서 오렴.”
엄마가 하윤이의 외투를 받아주었어요.
“반갑구나.”
아빠가 하윤이에게 따뜻한 코코아를 내밀었어요.
“왕! 왕왕!”
뭉치가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하윤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어요. 하윤이가 뭉치의 등을 쓰다듬었어요.
“와, 준비 많이 했구나!”
하윤이가 로희네 집을 둘러보며 말했어요. 하지만 로희는 시무룩했어요.
“꽃이 시들었어.”
“아직 볼 만한걸.”
“풍선은 쪼글쪼글하고.”
“하나도 티 안 나는데?”
“음식은 다 식어버렸어.”
“아주 좋아. 나 뜨거운 거 못 먹거든.”
하윤이가 괜찮다고 하니까 로희는 정말 모든 게 괜찮아 보였어요.
“자, 선물.”
하윤이가 로희에게 상자를 내밀었어요. 안에는 멋진 고깔모자가 들어 있었어요. 모자 꼭대기에는 루돌프 코처럼 새빨간 방울이 달려 있었어요. 로희는 냉큼 모자를 눌러썼어요.
“진짜 큰 케이크다.”
하윤이 눈이 반짝반짝 빛났어요.
로희와 하윤이가 함께 케이크에 초를 하나하나 꽂았어요. 엄마가 초에 불을 붙이고 아빠가 부엌 불을 껐어요.
모두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시작했어요. 로희도 박수를 치고 고깔모자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어요.
“축하한다, 우리 딸.”
“생일 축하해, 로희야!”
“왕, 왕왕!”
로희가 단번에 후, 하고 초를 껐어요.
엄마가 신나는 캐럴을 틀어줬어요. 아빠는 미키마우스 접시에 케이크를 올려줬고요. 뭉치는 로희와 하윤이 사이에 앉아 있었어요.
로희가 케이크를 한입 베어 먹었어요.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입안 가득 찼어요.
“하윤아, 맛있어?”
로희가 하윤이를 보고 물었어요.
“응. 내가 먹어본 케이크 중 제일 맛있어.”
하윤이가 입가에 생크림을 묻힌 채 씨익 웃었어요.
로희는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는 게 좋아졌어요. 눈이 내리고, 캐럴이 흐르고, 친구와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멋진 날이야.’
로희가 케이크를 한입 더 베어 먹었어요.
밖에서는 로희네 집을 향해 새로운 눈 발자국이 찍히고 있었어요. 다행히 케이크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