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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겨울을 준비할까

 

by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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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경 작가님의 『어떻게 겨울을 준비할까』를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문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잠부터 자자.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잠을 잤다.”
올해 불안했던 시기에 대해 담담하고 애틋한 위로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 문장을 보고 한참이나 먼 미래를 생각했던 무거운 마음을 잠깐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과 지내던 곳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고향으로 불러왔습니다. 그들에게도 지금은 겨울이니까, 겨울을 잘 준비하는 게 우선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김태경 작가님의 『어떻게 겨울을 준비할까』를 읽게 되어 참으로 따뜻한 위안을 얻었습니다. 

​김지현

 

겨울 동안

 

김지현 

   형주에게 고모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차 키와 관련이 있다. 고모는 열다섯 살인 형주에게 아버지의 차 키를 갖고 오라고 시켰다. 15년 전 그날은 설날이어서 어른들은 불콰한 얼굴로 거실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형주는 밖으로 나와 거실 현관문 옆에 걸린 차 키를 들고 다시 고모의 방에 들어갔다. 고모는 형주에게 컴퓨터 게임을 해도 된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어른들은 고모가 제 몸보다 큰 짐을 어떻게 갖고 갔는지, 결국 그 사람과 도망간 것이 아니겠냐며 퍼즐을 끼워 맞췄다.

   20년이나 흐른 지금에도 그날의 기억은 매우 뚜렷했다. 이 이야기는 매년 명절에 전해져오는 설화 비슷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모도 설화 속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만날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사람. 그러나 형주는 지금 아버지의 차를 끌고 나갔다 15년 만에 돌아온 고모에게 오리 국물을 주러 뒷산으로 가야 했다.

   형주는 오늘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버지의 집은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또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마을버스까지 타고도 20분이나 더 걸어야 하는 촌이었다. 걷는 내내 불그죽죽한 단풍 산들이 쭉 이어졌다. 형주는 수확이 끝난 가을 산에 남은 건 겨울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름답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아버지는 부엌에서 뭔가를 열심히 끓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오리였다. 겨울이면 아버지는 종종 오리를 잡아다 고았다. 오리는 닭보다 기름이 많아 냄비 앞에 서서 일일이 채 망으로 건져내어야 했다. 아버지는 귀찮은 기색 한 번 보이지 않고 열심히 기름을 건졌다. 오리의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팔팔 끓을 동안은 집 안 바닥이 미끄러웠다. 형주는 발에 힘을 준 채 살살 걸었다. 아버지는 보온병에 기름이 둥둥 뜬 오리 국물을 담고 뼈와 살은 따로 그릇에 옮겨두었다. 그는 형주에게 보온병을 주며 고모에게 전해주라고 말했다.

   “고모요?”

   “그래. 뒷산에서 내려오지를 않는다.”

   형주가 고모를 다시 못 볼 거라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필리핀에서 불법체류자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년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친척 중 누군가가 고모가 불법체류자여서 한국에 올 수 없고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돌아오지 못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런 고모가 돌아와서 할아버지가 남긴 뒷산에서 터를 잡으려고 하다니. 형주는 어안이 벙벙했다.

   형주는 뒷산에 오르다 보면 고모가 보일 거라는 단조로운 설명에 기댄 채 입구로 향했다. 바람이 날카롭게 불었다. 어렸을 때는 작은 언덕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산속에서 고모가 먹고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와 곳곳에 쌓인 낙엽들. 어디에도 사람 사는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물망처럼 둘러쳐진 나뭇가지를 헤집고 고모가 나왔다. 얼굴은 왜 이렇게 까만지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옹송그린 작은 몸집 때문에 어딘가 잔뜩 주눅이 든 느낌이었다.

   “저 기억나세요?”

   “형주, 형주구나.”

   고모는 형주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그녀가 지내는 곳으로 따라갔다. 지금은 창고로 쓰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한때 어린 고모와 아버지의 낡은 집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오래된 대청마루에 앉았다. 고모는 형주의 안부를 물으면서도 시선은 보온병에 향해 있었다. 그녀는 그가 건넨 보온병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뒤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니?”

   “아버지가 주라고 하셨어요.”

   “네 아빠는 매번 이런 식이다. 꼭 국물만. 다리는 자기 것이지. 이런 게 쌓이면 병이 되는 거다.”

   형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방 안을 힐끔 살폈다. 방 안에는 폴리 소재의 묵직한 짐 가방과 자주색 침낭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매번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곳이었는데 형주가 앉아 있는 대청마루까지 반들반들하고 매끈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리는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겁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형주는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는 오리 국물을 홀짝홀짝 마시는 고모를 살피며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그러면 일을 하자.”

   “네?”

   “마당을 치워야지.”

   고모는 형주에게 땅을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단단한 땅을 부수고 뒤섞어놓아야 씨가 섞일 수 있다고. 고모는 익숙한 모습으로 흙을 퍼 올리고 발로 밟았다. 형주는 얼떨결에 고모에게 삽을 받아 흙을 퍼 올리고 발로 밟는 일을 반복했다.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고모는 형주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삽을 달라고 말했다. 고모가 흙을 뜨면 형주가 땅을 밟는 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베이지색 컨버스 운동화에 구석구석 흙이 묻어 금방 시커메졌다. 고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삽질을 했다. 물기를 머금은 흙이 밖으로 수북이 쌓였다. 불현듯 형주는 고모가 정말로 이곳에 정착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고가 집이 되어가고, 마당은 밭이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너는 그동안 뭘 했니?”

   그때 그녀가 대뜸 형주에게 물었다. 형주는 제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학 졸업도 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면허도 땄고 무엇보다 일을 했다. 첫 직장은 선배가 소개해준 회사였다. 판교에 있는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회사에서는 다이어트 풍선을 만들었고, 형주는 마케팅을 담당했다. 풍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대표의 말에 형주는 밤이고 낮이고 풍선을 불었다. 잘 때가 되면 배가 살살 아팠다. 그 회사를 관두고서는 브이알 회사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마케팅을 했다. 브이알 고글을 끼고 있으면 세상과 잠시 멀어졌다. 모니터 화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회사는 공간을 대여해주는 사업이었다. 나라에서 지원을 받아 예산이 넉넉한 편이었다. 일도 편했다. 풍선이나 브이알 고글 같은 것을 불거나 끼지 않아도 됐고 월급도 그만하면 괜찮았다. 하지만 형주는 회사를 결국 그만두었다.

   직장을 떠올리면 버스가 생각났다. 퇴근길에 빨간 버스를 탔는데 앞 정거장에, 바로 뒤 정거장에 모두 형주가 다닌 회사가 있었다. 형주는 버스가 판교를 벗어날 때 이럴 거면 왜 판교에 살지 않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왜 서울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왜 그렇게 허덕이면서 나는 서울에 있기를 바라왔을까.

   “그냥 서울에 있었어요.”

   형주는 고모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고 되물었다.

   “고모는 왜 필리핀에 있었어요?”

   “그때 가장 빠르게 구할 수 있는 표였다.”

   “왜 갑자기 돌아오셨는데요?”

   그녀는 형주의 말에 외투를 여미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는 너무 춥지 않니?”

   “맞아요. 더 추워질 텐데. 사실 땅을 다질 필요가 없어요.”

   “알아보는 중이야. 겨울을 보낸 다음에도 여기서 더 지낼 수 있을까 싶어서.”

   “네?”

   “겨울에는 쉬어야 하잖아. 이 시골에서는 말이야. 그러니까 쉰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야지. 더 추워지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야지.”

형주는 더 묻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처럼 고모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서 불가피한 도피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고모는 혼자였다. 또한 고모가 그렸던 어떤 계획이나 삶이 그녀에게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형주는 잠깐 숨을 돌리며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나부꼈다. 어쨌든 지금은 고모가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그 이후는 각자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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