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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고백
- 고양이 휘파람*
조우리
혜선과 예리는 독립예술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는 동호회에서 만났다. 혜선은 동생이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어서, 예리는 친한 친구가 독립예술영화 전용 극장의 직원이어서 독립예술영화를 자주 보게 되었을 뿐 원래부터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실 둘은 독립예술영화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그저 텔레비전에 예고편이 나오거나 시내버스 옆면에 포스터가 붙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것만 알았다. 취미가 하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이왕이면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같이 이야기도 나누면 재미있지 않을까,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는 점도 같았다. 둘 다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동호회의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자주 마주쳤다. 우연히 서로의 나이를 알게 되었는데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고, 말을 놓는 친구 사이가 되기로 했다.
둘은 잘 맞았다. 그걸 둘도 알았다. 가벼운 농담의 온도가 잘 맞았고, 싫어하는 것들의 리스트가 같았다. 서로의 향수 냄새를 좋아했다. 그런데도 동호회 모임이 아니면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모임에서 만나면 둘이서만 붙어 앉아 이야기를 하면서도 둘만의 메신저 대화방은 없었다. 전화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둘 중 한 명이 모임에 나오지 않아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렇게 유독 죽이 잘 맞는 동호회 회원 사이로 지낸 지 1년째. 둘이서 함께 본 영화만 해도 서른 편이 넘었고, 영화를 보고 나서 마신 커피만 해도 백 잔, 같이 먹은 밥만 해도…… 그 모든 것이 모임의 다른 회원들과 함께이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제법 역사라고 할 만한 것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거’라고 하면, ‘저번에 거기’라고 하면, 다른 설명 없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영화 관람, 커피 한 잔, 밥 혹은 술을 함께할 사람들은 따로 자리를 이동하는 수순으로 동호회 모임이 진행 중일 때 예리가 혜선에게 슬쩍 영화 전단 한 장을 건넸다.
“이거 같이 보러 갈래?”
“언제?”
“다음 주에 개봉이야.”
“그럼 그 주말에 가야겠네.”
“그렇지, 아마 그다음 주말엔 안 걸려 있을 듯.”
“둘이만?”
혜선이 그렇게 물었을 때, 예리는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미루고 싶지 않았다.
“응, 둘이만.”
그렇게 둘이서 함께 본 영화는 청소년 감독이 만들었다는 그림자 연극 형식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제목은 ‘고양이 휘파람’이었고 설원에 살고 있는 눈표범과 검은 재규어가 주인공이었다. 상영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상영관 안의 관객은 혜선과 예리뿐이었다. 예리는 자신이 영화를 잘 고른 건지 잘못 고른 건지 판단이 되질 않았다. 그저 문득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보았던, 혜선이 팔걸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을 뿐.
엔딩 크레디트가 전부 올라간 뒤, 상영관 안의 조명이 켜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눈가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럴 때면 예리는 윙크를 하는 것처럼 왼쪽 눈을 완전히 감을 때가 있었는데 혜선은 그게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둘은 극장을 나와서 옆 건물에 있는 화덕피자집으로 갔다. 가게 안은 한산했고, 직원은 둘을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나 사실 화덕피자 처음 먹어봐.”
“그래?”
“난 도우가 빵처럼 두껍고 끄트머리에 치즈가 들어간 피자를 좋아하거든.”
“그럼 다른 거 먹으러 갈까?”
“아니, 화덕피자 먹으려니까 설렌다고.”
혜선의 말에 예리는 대꾸 대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둘은 피자 한 판과 파스타, 웨지감자와 샐러드가 나오는 커플 세트 A를 시켰다. SNS에 사진을 올리면 음료를 서비스로 준다고 해서 가게 이름을 해시태그로 붙여 사진도 올렸다.
“나도 어릴 때는 그런 피자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안 좋아해?”
“너무 많이 먹어서 좀 질렸어.”
“얼마나 많이 먹었길래? 피자 가게라도 했어?”
“우리 집은 아니고, 옆집이.”
“정말?”
예리는 아홉 살 무렵, 같은 동네에 살았던 이웃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리의 부모님과 같은 상가 건물에서 피자 가게를 했던, 삼십대 초반의 여자 두 명에 대해서. 예리가 피자 이모들이라고 불렀던, 그런 예리에게 늘 모차렐라 치즈가 레시피보다 두 배 넘게 올라간 피자를 만들어주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처음에는 둘이 자매인 줄 알았어. 웃는 얼굴이 꼭 닮았거든. 그러다 성이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러면 친척인가 했지. 서로를 가족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때는 그런 생각밖에는 못했어.”
주문한 피자가 나왔다. 루꼴라를 잔뜩 올린 마르게리타피자. 혜선과 예리는 이런 피자가 나오는 이탈리아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함께였고, 그래서 대화는 잠시 그 영화에 대한 내용으로 흘러갔다.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해변을 걷는 장면에서 흘러나왔던 음악에 대해, 마지막 장면에서 끝없이 이어진 것만 같은 도로를 질주하던 자동차와 엔딩 크레디트 끄트머리에 붙어 있던 추모의 말에 대해. 그런데 그 영화를 보았던 극장이 종로에 있었는지, 광화문에 있었는지 둘의 의견이 달랐다.
“광화문 아냐? 끝나고 교보문고에 같이 갔던 것 같은데.”
“아니, 종로였지. 거기서 교보문고까지 걸어갔잖아. 진짜 더운 날이었는데.”
“그래, 그랬다. 근데 다들 그냥 말없이 걸었잖아.”
“그런 영화들이 있지. 다 보고 나면 계속 걷고 싶어지는.”
혜선이 파스타에 딱 하나뿐인 커다란 새우를 예리의 접시에 옮겼다. 예리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았다.
“나 어릴 때부터 새우를 진짜 좋아했거든. 그래서 피자 이모들도 피자에 새우를 엄청 넣어줬어. 아마 나한테 해주던 그 피자 이름을 지으라고 하면 슈퍼치즈울트라새우피자라고 해야 될 거야. 한 이모는 자기가 치즈를 좋아하니까 맛있는 치즈 많이 먹으라고 많이 뿌리고 다른 이모는 내가 새우 좋아하는 걸 알아서 새우 잔뜩 넣어주고. 둘이 그렇게 성격은 다른데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했었어. 그러다 갑자기 가게도 닫고 이사를 가버려서 내가 며칠을 울었대. 이모들 보고 싶다고. 난 그것까진 잘 기억 안 나는데. 엄마가 가끔 그러더라. 네가 걔네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다고, 진짜 이모도 아니고 겨우 몇 달 친하게 지낸 건데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느냐고.”
예리는 말하는 내내 포크로 새우 껍질을 까면서 접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동안 혜선은 아무 말 없이 예리를 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다 너한테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예리가 고개를 들었다. 혜선이 웃고 있었다.
“난 알겠는데?”
* 소설 속 가상의 애니메이션 「고양이 휘파람」은 최재서 작가의 『아주 긴 절교』의 두 주인공, 눈표범 아틀란티스와 검은 재규어 이안에게서 떠올렸다. 끝을 떠올리면 시작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우정의 모양을 골몰하다 보면 사랑과의 차이를 알게 된다는 것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