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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by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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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고를 때 항상 작가의 말을 먼저 읽는 편이다. 나에겐 쓰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 사람이 쓴 글보다 더 궁금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김민지 작가는 『공이』 작가의 말에서 “올해로 열세 살이 된,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소녀작가 김민지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매력적인 소개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집필을 해왔다고 밝힌 작가의 세 번째 작품 『공이』와 그 다음해에 집필한 『밍의 도전은 계속된다』를 읽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작가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변화가 작품에 어떤 방식으로 담겼는지를 확인하며 독자로서 즐거움을 느꼈다. 김민지 작가와 서로의 책을 교환하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모쪼록 김민지 작가의 신작도 만날 수 있기를. 

​조우리

 

​수요일 블루스

- 파수꾼과 나그네*

 

조우리   

   “왜 아직도 수요일이지?”
   점심시간,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사무실에 홀로 남아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수영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놀랐다. 그 내용이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우선은 말을 하려던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고, 다음으로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 힘이 없는 나머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냥 속이 좀 답답해서 한숨이라도 크게 쉬어볼까 했던 건데 툭 튀어나와버린 그 말.
   그래, 왜 아직도 수요일이지? 어떻게 아직도 수요일밖에 안 됐을 수가 있지? 이게 말이 되나? 말이나 되는 일인가? 지금 느끼는 피로를 생각하면 목요일도 금요일도 아니고 토요일에 출근한 것만 같은데. 수요일이라고? 고작 수요일? 한참을 마른세수를 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던 수영의 귀에 메신저 알림 음이 들렸다. 고객사 모믹어패럴의 박 주임이었다. 그는 수영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메시지를 나누는 사이로, 최근 한 달 사이에 가장 많은 대화를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내용은 늘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하 대리님~ 맛점 하셨나요? 보내주신 시안~ 수정 한 번 더 해야 될 것 같은데~ 괜찮죠?
   “아니!”
   이미 그 시안은 여섯 번의 수정 끝에 나온 최종 시안을 수정해 다시 최종으로 만들었던 시안을 마지막으로 수정한 진정한 최종 버전이 아니었던가. 이번에는 또 왜! 뭐가! 어째서 수정이 아직도 남아 있느냔 말이야! 수영은 당장이라도 박 주임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모니터 한구석에서 깜빡이고 있는 대화 창을 노려보았다. 
―저번에~ 저희 과장님이 바꿔달라고 하셨던 3번 항목~ 아이콘 있잖아요~
―그거를 상무님께서는~ 원래대로 하는 게 나을 거 같다고 하셔서~
―한 번 했던 거니까~ 금방 되겠죠? 오늘 다시 주실 수 있죠?
   아니. 아~니. 아니~! 수영은 보내지도 못할 글자들을 입력했다가 지웠다가 반복하며 애꿎은 키보드만 거세게 두드려댔다. 박 주임이 습관처럼 쓰는 물결표가 너무나 얄미웠다. 
   구성안 3번 항목의 아이콘. 그건 모믹어패럴의 온라인 쇼핑몰 웹 사이트 개편 콘셉트에서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는 메뉴별 아이콘을 말하는 거였다. 메뉴 아이콘을 바꾸면, 그 아이콘과 어울리게 배치해둔 다른 구성 항목들의 위치도 조정해야 하고, 그렇게 위치가 조정되면 전체 레이아웃도 변경되어야 했다. 그건 당연히 ‘원래대로’ 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미 첫 수정에서 박 주임의 상사인 김 과장이 메뉴 아이콘 중심으로 사이트 개편을 요구하며 아이콘 디자인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네 번이나 수정하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사이트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메뉴 아이콘에 맞추어 변경을 거듭해왔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건 지금까지의 모든 수정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시안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주임님, 혹시…… 원래대로라는 말씀은 첫번째 드렸던 구성안에 있는 아이콘으로……?
―네~ 맞습니다~
―아…… 저도 저희 팀장님께 보고드리고 답변드릴게요.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닌 것 같네요.
―네~ 그러셔요~
   왜 저렇게 발랄할까. 뭐가 그렇게 산뜻해. 오늘이 아직도 수요일인데. 폭풍 같은 월요일과 억겁 같은 화요일을 지나 이미 내 기력은 다 소진되어버렸는데도 목요일과 금요일이 남은, 아니, 아직 수요일이 다 끝나지도 않은 오후 1시에! 수영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럴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왜 오늘이 화요일이지?”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공용 화장실 세면대에서 칫솔을 입에 문 채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다가 입가에 주르륵 흐르는 치약 거품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그렇게 말했었다. 왜 아직도 화요일이냐고. 아니, 그건 지난주 화요일일지도. 어쩌면 그 지난주일지도!
   수영은 결연하게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상사인 오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식사 다 하셨나요?”
   “어, 수영 씨. 왜? 속은 괜찮아? 들어가는 길에 먹을 것 좀 사다 줄까?”
   친절한 오 팀장. 그는 수영이 신입 사원일 때부터 사수였고, 지금의 팀에서 수영이 자리를 잡고 일할 수 있도록 무수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존경할 만한 선배였다. 그런 선배에게, 수영은 지금 폭탄을 투척하려 하고 있었다.
   “아뇨, 저 아무래도 속이 계속 안 좋아서. 오후에 반차를 좀 쓰려고 하는데.”
   “그래? 어떡해. 얼른 들어가봐요.”
   “그런데 팀장님, 모믹에서 추가 수정이 또 있다고……”
   “거긴 정말 왜 그럴까. 뭐래요?”
   “저도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팀장님께 메일드리라고 할게요.”
   “그래, 알았어. 병원 꼭 가요.”
   오 팀장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수영은 마음 한쪽이 따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스스로 살고 봐야 했다. 생각해보니 벌써 연말인데 변변한 휴가를 쓴 적이 없었다. 일단 지금은 쉬어야 한다. 내일 다시 이 전쟁터로 복귀하려면 지금은 전열을 가다듬어야 할 타이밍이다. 수영은 영영 낙오하는 것보다는 잠깐 이탈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주임님~ 사실 제가 오늘 휴가라서. 저희 팀장님께서 업무 진행하고 계시거든요. 자세한 말씀은 팀장님께 메일로 보내주시겠어요?
수영은 박 주임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답변은 확인하지도 않고 컴퓨터부터 껐다. 그리고 외투와 가방을 챙겨 다급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혹시나 엘리베이터에서 팀원들을 마주칠까 봐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차마 아직 닥쳐올 사태를 모른 채 식사를 마친 포만감과 약간의 여유가 드리워진 그들의 얼굴을 보고도 꾀병을 부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럴 때를 위해 조직이 있는 게 아니던가. 구성원 한 명의 공백 정도는 누군가가 메울 것이다.  
   ‘나는 당신들을 믿는다. 나는 온리 원이 아니다. 원 오브 뎀이다.’
   수영은 주문을 외듯 속으로 중얼거리며 회사 앞 버스 정류장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몇 달 전 모아둔 저축을 다 끌어모으고 전세 대출을 최고 한도로 받아 구한 집은 회사에서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회사 앞을 지나는 모든 노선이 수영의 집 앞을 지났기 때문에 출퇴근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면 좀 낫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도무지 풀리지 않는 피로는 몸의 것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태양이 하늘 높은 곳에 걸린 한낮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제야 아주 조금, 단단히 걸린 것 같았던 무언가가 부드럽게 녹는 듯했다. 수영은 휴대폰 전원을 껐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갔다. 수영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오늘만은 차가운 맥주가 당겼다. 딱 한 캔만 먹고 알딸딸하게 누워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틀어놓고 스르륵 잠들면 완벽할 듯했다. 안주로는 좋아하는 짭짤한 과자와 새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계산대로 향하는데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직원이 바코드를 찍다가 수영이 고른 맥주가 행사 상품이라며 한 캔을 사면 한 캔을 덤으로 준다고 말했다. 수영은 평소에는 그런 덤을 늘 거절하곤 했었다. 애초에 살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 공짜라고는 해도 의도치 않게 갖게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냉장고로 돌아가 맥주 한 캔을 더 꺼냈다.
   편의점에서 나와 골목 모퉁이를 한 번만 돌면 수영의 집이었다. 몇 분 뒤, 수영은 상상했던 그대로의 완벽한 모습으로 최고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하나 있었다.
   “어? 왜 벌써 와?”
   “자기는 왜 집에 있어?”
   분명 아침에 같이 현관을 나섰던 사람이 집 안에 있었다. 오늘 하루도 힘내자고, 퇴근하고 보자고 말했던 사람이. 가장 편한 옷을 입고, 반쯤 먹은 햄버거를 손에 쥔 채로, 거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 반차 냈어……”
   “나는 사실 오늘 연차……”
   수영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수영이 버스를 타는 것을 배웅하며 손까지 흔들고는 버스가 떠난 뒤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었을 것을 상상하니 그 모습이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온전히 혼자 보낼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니까.
   “어쩐지, 맥주가 하나 더 딸려 오더라니.”
   수영의 묵직한 가방을 받아든 사람이 수영의 볼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 김민지 작가의 『공이』에서 ‘파수꾼’과 ‘나그네’라는 단어를 얻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잘 알고 있으면 쉬어야 할 순간도 잘 알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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